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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객을 원한다면, 먼저 싸움을 걸어라. 영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거리의 예술가, 뱅시(Banksy)는 "낙서를 위한 가이드"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허락을 구하는 것보다 용서를 구하는 것이 쉽다." 불륜 현장에서 도망치다 창문에 매달린 남자의 벽화(아래)도 건물 주인에게 허락받지 않고 그린 그래피티(낙서)입니다. 낙서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오던 브리스톨 시의원회는 이 작품의 보존 여부를 여론에 맡겨 결정하기로 했고, 여론조사에 참여한 500 명 중 97 퍼센트가 보존하는 쪽에 찬성했다고 합니다. ![]() ![]() ![]() 뱅시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짜 작품을 몰래 전시하는 방법으로 상류층에 의해 독점되어 버린 고급 문화를 조롱하기도 합니다. 아래 "수퍼마켓 카트를 끄는 선사인간"의 벽화 조각은 대영박물관 한 구석에 몰래 전시되었던 것으로, 뱅시가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보물찾기 게임을 제안할 때까지 박물관 담당자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 ![]() ![]()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때로 극명하게 갈리기도 하고, 예술이 아닌 밴달리즘(valdalism)에 불과하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뱅시 자신은 불필요한 논쟁에 휘말리기 싫다는 이유에서 "아트(art)"라는 용어 자체를 사용하기를 거부합니다. 낙서를 표방하는 작품들인 만큼 감상자로 하여금 두 번 세 번 바라보고 싶게 만드는 아우라가 부족한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예술이든 아니든, 아니 예술이라는 게 무엇이든, 언더그라운드적인 저항 정신과 도시인적인 위트가 적절히 결합된 그의 창조물들이 텁텁한 도시 풍경 속에 매몰된 우리에게 한 줄기 시원한 바람처럼 다가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 1998년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애니메이션 후보작. 제목: MORE 감독: Mark Osbourne 상영시간: 6분 (퀵타임 필요) 영화 보러 가기 단 하나의 작품으로 한 시대의 전설로 남은 My Bloody Valentine의 리더 케빈 쉴즈는 팝 씬의 J.D. 샐린저와도 같은 존재이다. 앨범 <Loveless(1991)> 발표 이후 10년이 넘도록 그는 인터뷰 한 번 하지 않고 고고한 은둔자처럼 숨어 지냈다. 제작사로부터 다음 앨범 제작을 위해 받은 선금을 개인 스튜디오 짓는 데 다 써버린 후 정작 앨범은 내지않고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아티스트들의 믹싱 작업을 돕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았다. 최근 소피아 코폴라의 <Lost in Translation> 사운드트랙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싱글을 싣기도 했지만 진정한 재기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Loveless>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만 같은 수수께끼를 간직한 불가사의한 앨범이다. 노이즈와 멜로디의 구분을 무색케 하는 충만한 사운드가 주는 감성은 언어적인 표현을 거부하며. 마치 캄캄한 장롱 안에서 따스한 햇살을 받는 듯한, 또는 나른한 백일몽과 악몽이 뒤엉킨 것같은 이율배반적 마력으로 사로잡는다. 블린다 부처(보컬)은 분명 영어 가사로 노래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전혀 해독 불능이다. 케빈 쉴즈는 자신의 음악이 슈게이징, 드림 팝 등의 장르로 구분되기를 거부했고, 실제로 그의 음악에 영향 받은 많은 뮤지션들이 그의 독특한 기타 연주 기법과 감성을 재현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모던 락의 역사에서 <Loveless>만큼 독창적인 앨범은 다시 나오지 못했고, 15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세의 아티스트들에게 My Bloody Valentine과 끊임없이 비교되어야 하는 현실은 숙명이나 다름 없다. 케빈 쉴즈에 의해, <Loveless>에 필적하는 또 다른 경이적인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한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은 정작 아티스트 자신에게도 극복할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어 버린 모양이다.
영화 <괴물>의 괴수 묘사 ![]() 영화 <괴물>의 괴수는 기존 장르 영화와 달리 비현실적인 상상력을 억제한 "실존적 무게감"으로, 한낮에 한강변에서 꾸는 백일몽과도 같은 효과를 유도한다. 괴물은 자연의 물리/생태 법칙에 충실하며, 오로지 "관성의 효과"(실제로 괴물의 무브먼트는 대부분 사실적인 관성만을 강조하고 있다)와 "식육 본능"(괴물은 야생의 맹수와 매우 유사한 사냥 습성을 보인다)으로 인간을 공격함으로써 마치 인간이 먹이감이 되는 "동물의 세계"를 직접 목격하는 듯한 리얼리티 효과를 창출한다. "관성의 효과"와 "식육 본능"이라는 괴물의 특성은 실제로 괴물과 사회를 동일시하는 영화의 메시지와도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 "악의 화신"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이해관계에 의해 폭주하고 타락하는 약육강식의 현실적 사회권력을 상징한다. 스토리 전개 한국 사회의 묘사 정치 의식과 컬트성 영화 시작 부분의 포름알데히드 방류 장면은 실제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미국인 군무원과 한국인 부하 직원 사이의 예리한 갈등을 그리고 있다는 점 때문에 (고질라가 미군 기지에서 유출된 핵 폐기물을 먹고 자랐다는 가상적인 설정보다 훨씬 더) 정치적이고 노골적이다. 괴물의 최초 등장 씬에서 자기 몸을 던져 시민들을 구하는 미군의 이야기도 첫 장면의 과도한 정치성을 희석하기 위한 변명적 장치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조금 어색하다. ![]() 영화 <브라질> (테리 길리엄 감독) 반면 (부시 정권의 이라크 전쟁 개입을 풍자하는), "에이전트 옐로우" 이야기 전개의 정치적 "노골성"에 대한 평가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단순한 감정적 반미주의로 치부하기에는 부시 정권과 이라크 전쟁에 대한 비판은 이미 전지구적인 테마가 되어 버렸을 뿐 아니라, 그 암시 또한 매우 우화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장면들을 풍자적 삽화로 웃어 넘기지 않고 사실적 개연성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우 영화의 서사 구조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를 초래할 수도 있다. "왜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가 이슈가 되는 것일까?", "군대를 투입하지 않는 것은 에이전트 옐로우를 살포하기 위한 음모인가?", "강두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 격리 시설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을까?" "에이전트 옐로우가 투입되기까지의 과정은 왜 설명되지 않는 것일까?"...... 이 부분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것은 각각의 장면이 단순히 "정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인 소재가 컬트적으로 해석되고 있기 있기 때문이다. 허접스러운 방역복, 사팔뜨기 미군 군의관의 황당무계한 음모와 "노 바이러스" 사건, 강두의 뇌 조직 검사, 조잡스럽기 그지 없는 에이전트 옐로우 살포 장치까지.... 이 모든 장면들은 실제로 <브라질>, <12 몽키즈>와 같은 컬트 고전들을 멋지게 오마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애초부터 이러한 장면들은 사실 강두네 가족의 스토리 전개와 깊은 연관성을 갖지 않도록 설정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 장면의 완성도가 다른 부분에 비해 훨씬 덜 세련되고 조잡하고 그로테스크해 보이는 것 또한, 봉준호 감독이 컬트적 수법을 이용해 고의적으로 그 비현실성을 강조함으로써 영화 속의 잿빛 현실과 유리된 원색적 "풍자"와 "우화"로서 덧칠되도록 의도했기 때문이다. 현서의 희생 현서의 희생은 장르적인 관점에서는 주인공의 직계가족만은 반드시 살아남는다는 "헐리우드식 가족주의" 법칙의 파괴를, 그리고 사회적인 관점에서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가족 이기주의와 순혈주의"의 극복을 의미한다. 현서의 희생이 강두의 절절한 부성애를 넘어서는 새로운 희생의 동기로 연결된다는 설정은 깊은 여운을 남길 뿐 아니라 영화사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이고 의미있는 결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현서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 그 발단에서 전개까지 괴물과 공범 관계를 유지하면서 현서의 생환 가능성을 번번이 차단한 사회라는 사실은 영화에 짙은 비극성을 부여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바이러스 증거 없음"을 인정하는 미국 정부 성명을 듣다가 TV를 무심히 꺼버리고 그저 식사를 계속하는 강두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부조리한 사회가 강요한 숙명적 비극을 묵묵히 감내하면서 삶의 현장을 지켜내야 하는 소시민의 애환을 마지막으로 나직히 역설하고 영화의 주제 의식을 완성한다. ![]() 무단 방류된 독극물을 먹고 자란 한강 괴수에게 주인공 강두가 현서를 납치당하기까지의 도입 부분은 실로 압도적이다. 어떤 해외 관객은 <죠스> 이후 30 년만에 경험하는 충격이라 했는데 (봉준호 감독이 개인적으로 자부심을 느낀다는) 그 등장 방식의 참신성을 생각한다면 결코 생뚱한 표현이 아니다. 예산상의 문제로 보이는 CG 편집의 작은 실수들이 눈에 쉽게 띄지만 이런 사소한 디테일에 집중할 만한 여유는 없다. 영화는 현서를 잃은 강두가 경험하는 세상을 괴물만큼이나 무자비하고 무질서한 모습으로 그리면서 (근년의 한국의 발전상에 한껏 고무된 우리에게) 무척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통쾌한 방식으로 한국 사회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영화가 그려내는 인간 군상은 <살인의 추억>의 배경이 된 80년대 농촌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유족들을 격리해야할 잠재 보균자로만 취급하는 정부, 생존자 위치 추적을 거부하는 태만한 경찰, 권위주의적인 의사와 간호사, 손녀를 잃은 할아버지의 돈을 갈취하는 흥신소 일당, 뇌물에 눈이 먼 공무원.... 균형을 잃고 퉁퉁 불어 오른 괴물의 끔찍한 형상과 닮은 일그러진 사회의 영상이 무채색의 한강 풍경을 배경으로 덧칠된다. 현서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된 가족들이 병원을 탈출하고 한강 하수도를 헤매기 시작하면서, 관객들은 이제 가족의 단합과 감동적인 승부를 기대하지만 감독의 반전은 끝이 없다. 특히 강두가 미군 의사에게 뇌 조직 검사를 받는 장면은 봉준호 감독의 컬트적인 천재성이 발휘되는 백미이다. 한강 괴수, 에이전트 옐로우, 빨간 수원시청 츄리닝 차림의 양궁 여걸까지... 영화는 판타지 또는 정치 패러디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드는 듯 하지만 실제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어설픈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극도의 사실성, 너무도 현실적이기에 어두운 결말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 속의 현실이다. 현서의 무력한 투쟁과 죽음은 관객들의 가슴을 서서히, 힘겹게 조여온다. 현서를 집어삼키고 한강을 가로지는 괴물, 그리고 괴물을 쫓아 한강 다리를 달리는 강두의 절규에서, 괴물 같은 세상에 대한 무력감, 절망감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마지막 씬... 강두는 현서 대신 거두어 들인 고아 소년을 위해 두 사람만의 밥상을 차린다. (이 장면은 온 가족이 상상 속에서 현서와 함께 식사하던 장면과 묘한 감정적 대조를 이룬다.) 딸 밖에 모르던 강두의 절절한 부성애는 현서의 희생이 남긴 새로운 대상을 찾아 승화된다. 맹목적인 한국식 순혈주의(또는 헐리우드식 가족주의)를 뛰어넘는 잔잔한 인간애와, 한 소시민의 비극적 운명을 위로하는 듯한 눈 내린 한강 둔치의 고즈넉한 풍경이 오버랩되면서, 영화 괴물은 괴수 영화로서는 (첫 장면 만큼이나) 극히 이례적인 마지막 장면을 마감한다. 영화 <괴물>은 사회성 짙은 비주류적 시점으로 장르 영화의 아쉬움을 시원스럽게 날려버리는 감동적인 걸작 괴수영화였다. 시대의 흐름과 분위기가 영화에 힘을 실어 주기도 하고 빛을 바래게도 하지만 그의 영화만큼은 언제 어느 장소에 가져다 놓아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을 것만 같다. 어떤 면에서 보나 결코 쉽지 않은 시도였다는 점에서 <살인의 추억>의 족적을 훌쩍 뛰어넘는 기념비적 성과를 이루어낸 천재 감독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벌써부터 그의 다음 작품이 애타게 기다려진다. [리뷰 두 번째] 영화 <괴물>의 서사 구조와 메시지 ![]()
- <Life of Pi (Yann Martel, Harvest Book, 2001)>에서 발췌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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